성씨는 대대로 내려오는 혈연집단의 명칭입니다. 성씨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먼저지만 기록된 후손이 없고 신라 때부터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신라 최초의 성은 ‘김진흥’으로 그가 바로 진흥왕입니다. 그 후 신라에서 성은 왕족과 진골만 사용하다가 점차 6두품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소수였습니다. 진흥왕 이전 인물의 성은 후대에 역사를 기록하면서 소급해 붙인 것입니다.
고려 건국 후 태조 왕건은 개국공신 4명(홍설 백옥삼 능산 복사귀)에게 성을 하사합니다. 이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고 각 성씨의 시조가 됩니다. 성을 하사 받기 전까지 이들은 성 없이 이름만 불렸습니다. 그리고 지방의 주요 호족들에게도 성을 하사해 태조4년(960년)이 되면 중앙 정부에는 절반 이상의 관리가 성을 사용하게 됩니다.
족보는 어떤가요? 조선 들어 성씨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유력 집안들은 ‘족보’라는 걸 만들기 시작합니다. 알려진 가장 오래 된 족보는 안동권씨 성화보(1476)입니다. 그 후 1565년에 문화유씨, 강릉김씨, 1576년에 능성구씨 족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15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족보라면 가짜일 가능성이 거의 100%입니다.
유력 가문의 양반, 그것도 극소수만 있던 족보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신분제의 경계가 낮아진 영향이 큽니다. 새로 양반으로 편입됐거나 ‘납속책’이라고 나라에 돈을 내고 관직을 사거나 신분을 바꾼 천민들이 족보를 사기도 하고 위조하거나 아예 새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족보의 90%가 17~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혼란은 일제 강점기 때 또 한번 일어납니다. 조선 후기까지도 천민은 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의 창씨개명으로 누구나 성과 이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여파로 1920년대 가장 많이 출판된 책자가 바로 ‘족보’라고 합니다.
초기 족보는 아들 뿐 아니라 혼인으로 들인 사위의 집안까지 기록했기 때문에 위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쪽 집안의 족보와 비교해 크로스체크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족보에 아들만 기록하면서 위조와 조작이 쉬워졌고 특히 시조부터 십 몇대까지는 독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기록이 부실하거나 나중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면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족보로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마땅한 시조가 없거나 다른 성씨의 족보를 사용하다 충돌을 일으키기보다 당시 ‘글로벌 스탠다드’인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추적도 어렵고 선진국에서 온 중요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흔히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합니다.(우리 족보가 딱 이 조건에 해당하는데 의심스럽네요)
참, 그리고 성씨와 관련해 ‘천 방 지 추(축) 마 골 피’ 성씨를 쓰는 조상은 천민이라고 하는 속설이 있는데 개뻥입니다. 심지어 천은 무당, 방은 목수, 지는 지관 추는 소백정, 마는 말백정, 골은 뼈를 다루는 백정, 피는 가죽을 다루는 천민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대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여기서 진짜 천민은 백정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평민들입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성이 없던 천민들이 성을 만들어야 할 때 굳이 희귀한 성씨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김, 이, 박 같은 유력 가문의 성을 만들어 눈에 띄지 않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이지요. 실례로 조선 건국 공신 마일성 장군, 충무공 이순신의 장인이며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 모두 양반입니다. 에고 쓰다 보니 또 길어지네요. 더 재미있는 얘기는 다음 기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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