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오월은 가정의 달이자 감사의 달이다. 우리는 이 계절에 마음을 대신할 꽃을 찾고, 그 대표적인 꽃으로 카네이션을 떠올린다. 그러나 꽃이 언제나 꽃의 형태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 꽃은 물감의 층으로, 시간의 단면으로, 오래 견딘 노동의 흔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대구 갤러리제이원에서 열리는 권기자 작가의 초대전 《겹쳐진 시간의 흔적》이 바로 그러한 전시다. 전시는 2026년 5월 7일부터 5월 23일까지 대구 중구 봉산문화길 60 갤러리제이원에서 이어진다.
권기자의 화면은 처음에는 지층의 단면처럼 보인다. 겹겹이 쌓인 색의 층은 흙과 암석, 침전과 압축, 시간의 퇴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면 그 첫 인상은 서서히 물러난다. 지층이라 여겼던 단면은 어느 순간 얇은 카네이션 꽃잎처럼 피어난다. 단단한 물감의 층이 부드러운 꽃잎으로 변하는 이 시각적 전환이야말로 권기자 회화가 지닌 가장 독특한 미학이다.
작가는 평면 캔버스의 한계를 넘어 물감을 흘리고, 말리고, 압축하고, 단면을 베어내는 과정을 통해 물감을 하나의 오브제로 만든다. 물감은 더 이상 색을 칠하는 재료가 아니라 시간이 응고된 물질이 된다. 갤러리 측이 그의 작업을 “시간의 화석”이자 “사유가 응축된 지층”이라 설명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물감의 축적이 아니다. 오월이라는 계절이 작품을 다시 읽게 만든다. 수백, 수천 겹으로 포개진 물감의 단면은 어느새 카네이션 꽃잎처럼 보인다. 감사의 마음은 대개 말로 표현되지만, 권기자의 작품에서는 말 이전의 물질로 쌓인다. 감사는 색이 되고, 시간은 꽃잎이 되며, 노동은 조용한 헌화가 된다.
한국예술가협회를 이끌며 수많은 작가의 화면을 마주해 온 입장에서 보더라도, 권기자의 회화는 단순한 추상이나 장식적 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온 시간의 압축이며, 물질을 통해 기억을 보존하려는 수행이다. 작가는 물감을 쌓지만, 사실은 자신의 시간을 쌓는다. 단면을 베어내지만, 사실은 삶의 내부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화면 앞에서 묻게 된다. 이것은 지층인가, 꽃잎인가. 시간인가, 감사인가. 상처인가, 아름다움인가.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중적이고 복수적인 메시지를 품는다. 멀리서 보면 단단한 시간의 퇴적이고, 가까이서 보면 여린 꽃잎의 떨림이다. 물질로 보면 두껍고 무겁지만, 감정으로 보면 가볍고 섬세하다. 바로 그 모순 속에서 권기자 회화의 깊이가 발생한다.
오월의 카네이션은 하루 이틀이면 시든다. 그러나 권기자의 카네이션은 물감의 층 속에 오래 남는다. 그것은 꺾인 꽃이 아니라 쌓인 꽃이다. 말로 전하지 못한 감사, 쉽게 드러내지 못한 아름다움, 오래 침묵 속에 간직해 온 마음이 물감의 층으로 피어난다.
권기자의 《겹쳐진 시간의 흔적》은 그래서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시간이 어떻게 꽃이 되는가에 대한 조용한 증언이며, 물감이 어떻게 감사의 언어가 되는가에 대한 깊은 사유다. 금보성 한국예술가협회 이사장으로서, 이 오월에 그의 화면 앞에 오래 머물기를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bp_kmh@beyond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