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한강신도시에서 자동차로 20분만 강화 쪽으로 들어가면 중소 규모의 다양한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상당수는 외국인입니다. 이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폭행, 임금 체불, 인권 침해 등은 그동안 너무 많이 보도돼서 이제는 뉴스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 공영방송에서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을 한동안 방영했었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 여성들이 한국에 살면서 경험한 에피소드와 문화 차이를 비교하면서 말 그대로 ‘수다 떠는’ 컨셉트인데 제법 인기가 높았습니다. 한국인 못지 않게 말을 잘하는 사람부터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친구까지 이들의 한국말 구사 수준의 층위는 다양했습니다.
남아공에서 온 브로닌은 간단한 소통은 문제 없지만 깊은 대화는 어려운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 그의 화법은 이렇습니다. “1년 성균관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학교에서 미디어 컬처커뮤니케이션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아공에서 공부하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영어 했습니다. (그때는)한국말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태국 중국 여행 갔습니다. 한국 다시 왔습니다. 지금 나는 한국어 육 달 공부했습니다. 한국말 못한다고 나는 바보 아닙니다.”
마지막에 “한국말 못한다고 나는 바보 아닙니다”라고 한 말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진하게 자리잡고 잊혀지지 않습니다. 서툰 우리말 때문에 자기 나라에 있을 때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무엇을 공부했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장난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다정하고 성실하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한국어를 못하면 그들의 존재는 서툶이나 어리석음으로 이해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고유한 정체성과 재능까지 지워져버립니다. 그래서 말을 어눌하게 하는 순간 그 사람의 세계는 순식간에 지워지고 그들에게 허락되는 일의 범위도 한정적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무시해도 좋은 인격체로 떨어져버립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노스웨스턴대학교 심리학과 비오리카 마리안 교수가 쓴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외국어를 쓰면 모국어 안에 잠자던 또 다른 자신이 깨어날 수 있다. 언어의 종류가 바뀌는 것만으로 인간의 판단방식이나 감정상태까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다중언어 사용자들에게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보다 모국어로 들려줬을 때 훨씬 더 강하게 반응한다든지 윤리적 결정이 어려운 질문에 외국어로 답하면 더 공리주의적 결정을 내린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외국어를 사용하면 심리적 거리감이 늘고 감정적 개입은 줄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나 유학생들은 몸만 한국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온 언어와 문화를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 ‘한국식’으로만 살라는 폭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한 인간을 서툰 사람 취급해 버리는 사회라면 결국 우리의 정신세계도 함께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