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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성 비엔날레, 의식의 선한 테러

김민혁 기자 | 입력 : 2026-09-21 12:08

- 27미터 한글 회화가 던진 문화 혁명
- 전시와 작품의 생태계를 바꾸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전남 나주의 한 전시장에 길이 27미터, 높이 5.5미터의 회화가 펼쳐졌다. 숫자만 놓고 보면 거대한 작품 하나가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금보성 비엔날레의 두 번째 전시가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작품의 물리적 크기에 있지 않다. 그것이 한국 현대미술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규격’과 ‘중심’의 문제를 동시에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회화는 오랫동안 ‘호수’라는 규격 안에서 제작되고 전시되고 유통돼 왔다. 10호, 50호, 100호, 500호라는 단위는 편리하다. 하지만 편리한 제도는 때때로 창작의 한계가 된다. 작가는 작업실의 크기와 전시장의 벽, 운송비와 보관, 판매 가능성까지 고려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작품을 제도의 크기에 맞춘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500호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답은 1000호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호수 자체가 사라지는 회화’일 수 있다.
나주 송림아트센터에 설치된 금보성의 27미터 회화는 이 오래된 관습에 질문을 던진다. 작품이 공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공간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한다. 관람객 역시 한 자리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 물감의 흔적을 보고, 옆으로 이동해 기호를 읽고, 다시 물러나 전체의 구조를 살펴야 한다.

그 순간 회화는 벽에 걸린 평면을 넘어선다. 관람객의 걸음과 시간까지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글의 숲을 걷게 되는 것이다.

금보성 작업에서 한글은 더 이상 읽기 위한 문자만이 아니다. 자음과 모음은 해체되고 이동하고 결합하면서 색과 선, 면과 기호의 조형언어로 전환된다. ‘무엇이라고 쓰였는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앞선다.

- 읽는 한글에서 보는 한글로.

그리고 27미터에 이르러 그것은 다시 한 단계 확장된다.

이 변화는 한글을 소재로 삼았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문자를 회화로 바꾸고, 회화를 공간으로 확장하며, 마침내 관람자의 신체 경험까지 작품에 포함시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실험이 서울의 대형 미술관이 아니라 나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생산과 담론, 시장과 전시는 오랫동안 서울에 집중되어 왔다. 지역은 흔히 서울에서 만들어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소비지로 취급됐다. 좋은 작품은 서울에서 발표되고, 검증된 뒤 지역으로 내려간다는 오래된 문화적 위계가 존재해왔다.

그러나 나주의 실험은 그 방향을 뒤집는다.

작가가 현장에 머물고, 그곳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100여 일이 흐른 뒤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전시장을 바꾼다. 이 경우 나주는 완성된 작품이 도착하는 종착지가 아니다. 작품이 태어나고 변화하는 생산지가 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지역문화의 경쟁력은 미술관 건물의 숫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백억원을 들여 문화시설을 건립한다고 해서 그곳이 곧 문화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머물고, 작업하고, 전시하고, 관람객이 찾아오며, 주변의 미술관과 레지던시, 카페와 골목, 지역 주민과 상권이 연결되는 순환이 만들어져야 한다.

문화는 건물이 아니라 관계이며, 시설이 아니라 생태계다.

송림아트센터를 중심으로 나주미술관, 소감카페, 송림레지던시 등 주변 문화공간이 연결되는 움직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의 전시가 또 다른 공간으로 관람객을 이동시키고, 작가의 체류가 지역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그것이 다음 전시와 창작으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문화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금보성 비엔날레가 스스로를 ‘개인 비엔날레’라고 명명한 것도 기존 비엔날레 제도에 질문을 던진다. 첫 전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약 100일 뒤 두 번째 작품으로 공간을 다시 구성했다는 점은 전시를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생성되는 시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비엔날레가 반드시 거대한 조직과 막대한 예산, 수많은 참여 작가를 전제로 해야 하는가. 한 작가의 장기적인 창작과 장소의 변화, 관람객의 반복적인 방문 역시 하나의 비엔날레적 시간 구조가 될 수 있는가.

동의 여부와 별개로 이러한 질문 자체는 한국 미술계가 검토할 가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주의 27미터 회화는 일종의 ‘의식의 선한 테러’다.

여기서 테러란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익숙한 미술의 문법에 가해지는 인식의 충격을 말한다. 27미터의 작품을 본 다른 작가가 자신의 100호 캔버스 앞에서 단 한 번이라도 “왜 나는 이 크기로 그리고 있는가”라고 묻게 된다면 그 충격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왜 새로운 현대미술은 언제나 서울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왜 지역은 중앙에서 만들어진 문화를 전달받는 마지막 장소여야 하는가. 나주에서 작품이 생산되고 새로운 미술적 담론이 발생한다면 중심과 주변의 지도 역시 다시 그려져야 한다.

한국 현대미술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미술관만이 아니다. 기존의 규격을 의심하는 작가, 실패를 감수하고 실험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러한 창작을 지속적으로 받아낼 지역의 문화생태계다.

그래서 나주에서 벌어지는 이 실험의 성패를 27미터라는 숫자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작품 이후 무엇이 남느냐는 것이다.

금보성 /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금보성 /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새로운 작가가 들어오는가.
새로운 관람객이 다시 찾아오는가.
지역의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는가.
그리고 나주에서 시작된 미술적 질문이 다른 지역과 다음 세대의 작가에게 전달되는가.

그 순환이 만들어진다면 27미터보다 훨씬 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예술의 크기는 캔버스의 규격이 결정하지 않는다.

문화의 중심 역시 행정구역이나 수도의 주소가 결정하지 않는다.

작가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한 지역이 그 상상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새로운 중심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거대한 그림 한 점이 아니다.

현대미술의 진원지가 서울 밖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작은 지각변동이 지금 나주에서 시작되고 있다.

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bp_kmh@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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