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김신 기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진 경우, 이후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준강간죄가 성립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술을 마셨다’거나 ‘성관계 당시의 기억이 없다’는 사정만으로 준강간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피해자가 정상적인 판단이나 대응이 어려운 상태였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이러한 상태를 인식하고 이를 이용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형법 제299조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한 경우 준강간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 등의 영향으로 의식을 잃은 경우뿐 아니라,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능력이나 대응·조절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취중 성관계 사건에서는 이른바 ‘블랙아웃’과 ‘패싱아웃’을 구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블랙아웃은 당시 행동이나 대화 등은 가능했지만 이후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형성 장애를 말한다. 반면 패싱아웃은 술의 영향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사후에 기억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의식이나 판단능력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법원은 당시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음주량과 음주 속도, 평소 주량뿐만 아니라 CCTV에 나타난 걸음걸이와 행동, 주변인과의 대화 내용, 성관계 전후의 연락 내역, 당사자들의 관계와 만남의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다만 단순히 대화를 나누거나 걸어 다녔다는 사정만으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있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
준강간죄에서는 상대방의 상태에 대한 행위자의 인식 역시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실제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더라도, 행위자가 피해자를 그러한 상태라고 인식하고 이를 이용해 간음하려고 실행에 착수했으며 객관적으로 범죄 결과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었다면 준강간 불능미수가 성립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결국 취중성관계 사건은 ‘술을 마셨다’거나 ‘기억이 없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당시 상대방이 성적 행위에 대해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 행위자가 그 상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등을 사건 전후의 객관적인 자료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취중성관계 사건에서는 단순히 음주 여부나 사후 기억의 유무만으로 준강간 성립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당시의 의식과 판단능력, 행동 상태,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관계, 상대방의 상태에 대한 인식 등을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면밀히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