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화가 다르면 이해 못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살면서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게 “다음에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를 들을 때라고 합니다. 보통 자기 나라에서 “밥 먹자”고 하면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잡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한국에서 “그러면 언제 만날까?”라고 구체적으로 진도를 나가면 상대가 오히려 당황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말이 한국에선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인사말로 쓰인다는 사실에 놀라워합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반은 진심이고 반은 여지를 두는 어법입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다음에 만나면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해 앞으로도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암묵적 희망이 담긴 완충적 표현입니다. 약속이 성사되지 않아도 양쪽 어디에도 책임을 묻지 않는 한국식 관용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보자”가 아니라 왜 굳이 “밥 먹자”라고 할까요. 우리에게 밥은 단순한 끼니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서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인용돼 유명해진 “밥은 먹고 다니냐?”에는 안부, 생존, 조롱, 위로, 정서상태, 경제적 상황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밥은 시대와 환경, 누가 쓰느냐에 따라 항상 끼니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풍요를 지나오는 동안 밥은 생존과 희망, 공동체의 정서가 섞인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선 여러 문장으로 표현할 내용을 한국어는 이렇게 ‘밥’이라는 하나의 기호로 압축해버린 것입니다.
‘밥값 좀 해랴’ ‘밥맛 떨어진다’ ‘밥줄 끊겼다’ ‘밥숟가락 놓았다’ 등 역할, 의욕, 생계, 생명 같은 무거운 얘기도 모두 밥을 매개로 설명합니다. 밥은 한국인의 삶과 언어를 잇는 두터운 상징이 됐습니다. 좀 비약하면 아기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음식, 곧 엄마 젖을 통해서입니다. 자식과 엄마의 사랑이 ‘젖줄’로 맺어진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사랑도 ‘식사’를 통해 은연중에 교환됩니다. 그렇게 보면 밥을 함께 먹는 행위는 생명의 근원부터 함께 먹는 즐거움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마법의 이벤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만남과 협상, 화해가 밥 먹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일상적인 인사에는 한국인의 삶을 지탱하는 감정과 정서, 배려,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언어는 결국 그 사회가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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