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형제 중 장남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는 막냇동생에게 연락을 하셨습니다. 지금 타는 자동차가 낡아서 바꾸고 싶은데 나이가 있으니 오래는 못 탈 테니 리스나 중고차를 알아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조그맣게 사업체를 운영하는 막내가 회사에서 리스자동차를 이용하니까 아무래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동생이 알아보니 리스는 조건이 안 되고 아버지는 의지가 강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난처하다고 뒤늦게 나에게 상의를 해 온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 정도 연세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거나 자식들이 빼앗는 게 일반적이라 동생은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게 걱정이 됐던 모양입니다.
우리 세 형제는 협의 끝에 자동차를 새로 해드리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고령에 운전하시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근처 병원과 동네 마트 정도 다니시는 거니까 자동차가 없어서 겪는 불편보다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아버지가 그 연세에 여전히 의욕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 더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하고 싶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며 삶에 대한 의지와 목표가 뚜렷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의 의견과 자동차는 이미 주문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펄쩍 뛰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자동차를 타면 얼마나 더 탄다고 새 차를 사냐”며 당장 주문을 취소하라며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동차가 출고되자 며칠 동안 아버지는 주차장에 내려가 몇 시간씩 설명서를 보면서 자동차와 씨름하셨다는 걸 나중에 어머니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하긴 요즘 자동차는 전자장비도 많고 전에 없던 기능이 많긴 합니다. ㅋㅋ
아버지는 1938년생으로 내년이면 여든여덟이 되십니다. 조선은 망한 지 오래고 대한민국은 아직 태동하기 전, 그러니까 아버지는 남의 나라 식민지 백성으로 생을 시작했습니다. 요즘이라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해방을 맞았고 이제 기를 좀 펴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그 많은 전쟁소설의 주인공과 그 가족처럼 운이 나빴더라면 포연 자욱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전쟁 통에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 가난은 떨어지지 않는 부적처럼 괴롭혔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가장이 되고 나와 동생들을 키우는 동안 아버지도 우리 사회도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고 그의 아이들은 중진국의 아이들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조국은 선진국의 끄트머리에 다달았고 주정뱅이 정신병자 같은 놈이 작년에 일으킨 내란 같은 이상한 일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선진국의 시민으로 생을 마치실 것입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세상에 와서 선진국 시민으로 떠날 아버지가 살면서 맞닥뜨렸던 순간순간은 절망이었을지 모르지만 전체 인생을 돌아보면 상승이고 도약이었습니다. 한국의 보통 부자관계처럼 아버지와 나는 살갑게 지내지는 못해서 말씀은 못 드렸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 자동차를 가능하면 오래오래 타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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