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폭염이 끝나고 마.침.내. 가을이 오긴 왔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 때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만추(晩秋)》.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1966년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2011년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현빈, 탕웨이 주연의 《만추》입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 영화는 그랬습니다.
남편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들어간 중국인 여자 애나. 애나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수감 7년 만에 감옥 밖으로 나옵니다. 72시간, 즉 3일간 휴가를 얻은 것입니다. 어머니 장례식에 가기 위해 시애틀로 가는 버스에서 한국인 남자 훈을 만나게 됩니다. 훈은 여자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직업을 가진 닳고닳은 남자처럼 보입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관객에게 참 불친절합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주인공 애나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훈이라는 남자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영화는 잘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현빈 보러 갔다가 탕웨이를 보고 나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가 어느 지점에서 ‘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 짧은 휴가기간 여자로서의 본능이 살아난 애나는 예쁜 옷을 사고 귀고리를 걸어 보다가 교도관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랍니다. 다시 죄수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가버리는 장면은 시애틀의 안개처럼 가라앉고 뭔가 사연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데 누구도 그걸 설명하지 않습니다.
프로인 척하지만 진짜 사랑 앞에선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어설픈 남자 훈과 애나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보면서 ‘저런 사랑을 이해하려면 최소 마흔은 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존 로맨스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뭐야, 이게?’ 라며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그래서 사랑하는 거야, 아닌 거야?’ ‘그들은 다시 만난다는 거야?’를 관객이 추측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흥행에는 재미를 보지 못한 게 당연합니다.
여러 번 보면서 내 나름의 결론을 생각해봅니다, ‘사랑이라는 건 결국 시간을 선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훈은 애나에게 계속 시계를 줍니다. 그러면서 자꾸 시간을 물어봅니다. 애나가 72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휴가를 보내는 동안 훈은 애나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또는 기억)을 선물한 셈입니다. 참, 만추는 아니지만 사진은 가을이 익어가는 서울의 한 거리에서 찍었습니다. ^^*
sglee640@beyondpost.co.kr
<저작권자 © 비욘드포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