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올림픽에서 100m달리기나 수영 경기를 보면서 열광하고 빨리 달리고 헤엄친 사람 목에 메달을 걸어 줍니다. 가만 보면 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사람보다 훨씬 빨리 달리는 자동차, 모터보트도 있는데 굳이 사람이 빨리 뛰고 헤엄치는 걸 보고 열광하다니요.
사람은 이제 바둑에서 더 이상 알파고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바둑을 둡니다. 왜 그럴까요. 예술, 특히 미술의 역사에서 사진기는 엄청난 역할을 했습니다. 카메라가 발명되자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사람(화가)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후에 우리가 지금 아는 것처럼 미술의 다채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인공지능을 보고 생각하는 게 19세기 미술가들이 먼저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미술가라는 직업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들이 찾은 방법 – 유일한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 은 이런 것입니다.
마르셀 뒤샹처럼 소변기를 갖다 놓고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게 작품인지, 예술인지 혹은 가격이 얼마인지 결정하는 건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동차보다 느린데도 사람이 뛰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달리는 직업은 살아남게 됩니다. 알파고가 있어도 인간이 바둑 두는 걸 보겠다고 하면 프로기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요. 인간보다 더 잘하는 기계가 있지만 인간이 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방식 외에 인간이 살아남을 방법이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방식은 기계가 인간을 앞지르기 시작한 19세기부터 인간이 살아남은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더 사랑하고 우리들이 하는 일에 우리가 더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살아남는 방법은 인간이 상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11/1) 서울대 목암홀에서 전 프로기사 이세돌이 ‘인공지능과 창의성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바둑을 보드게임이나 정신스포츠가 아닌 예술로 배웠다. 바둑돌이 만드는 작품으로 여기고 자부심을 가졌다. 명국(名局)을 두는 게 목표였는데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명국은 혼자만 잘 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상대도 잘 둬야 하고 한 수 한 수 책임지지 않으면 명국이 될 수 없다. 그런데 AI는 ‘최선의 수’가 아니라 ‘이기는 수’만 둔다. 정답이 없는 게 예술인데 AI는 그냥 보드게임 같다.”
어쩌면 이세돌의 말에서 AI시대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실마리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 인본주의, 인문주의 모두 그냥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따져보면 우리가 믿는 가치들도 다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인공지능 같은 첨단 과학 때문에 생겨난 위기도 같은 방식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일하는 사람이 자존감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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