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에서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악의 평범성’으로 번역된 이 말은 6백만 명을 학살한 건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악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생각 없음(무사유 thoughtlessness)’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2.3내란 당시 계엄사령관을 맡았던 자는 국방장관의 포고령이 절차를 거쳐 작성됐다는 대답 한 마디에 아무런 검토절차 없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또 방첩사령관이라는 자는 인터뷰에서 “맞고 틀리고를 떠나 위기상황에서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내란이 성공했더라면 이런 자들 때문에 수백,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고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더 밝혀지겠지만 진짜 시키는 대로만 한 것이든, 내란에 적극 개입했지만 실패하자 저만 살겠다고 변명하는 것이든 무지, 무사유, 무능한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계엄 선포 후 방첩사령부 젊은 법무관 7명은 “계엄 상황이라도 혐의사실만으로 압수수색을 할 순 없다”면서 계엄군이 선관위에 진입해선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홍장원 국정원1차장은 국회의원 체포 리스트를 듣고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또 류혁 법무부감찰관은 ‘계엄과 관련된 일체의 지시나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며 곧바로 사표를 던져버렸습니다.
윗선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불법 계엄에 동조한 군 지휘부 행태와는 대조적인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됐고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책임지는 헌법기관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계엄은 주모자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책임이 있는 고위공직자라는 자들은 반성이나 사과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는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였고 포고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발뺌하기 바쁩니다. 일선 지휘관들은 ‘나는 몰랐다’로 일관합니다.
남미 아르헨티나까지 도망가 성형하고 이름까지 바꾸고 살다가 이스라엘 비밀정보원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이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어쩌면 내란을 계획하고 가담했거나 시키는 대로 따랐던 ‘그날’의 대한민국 지휘관들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정상적이며 성실한 이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평범한 사람이 6백만 명을 학살하는 인종청소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아이히만’들도 그렇게 할 뻔했습니다. ‘악’은 특별한 사이코패스나 악마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행위, 인간에 대한 사유능력이 부재하면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누구나 ‘악의 평범성’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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