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 고수리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운이 오래 남는 에피소드를 각색해서 옮깁니다.
아파트단지에는 유치원부터 영어학원, 태권도학원 등 다양한 버스들이 드나듭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등하원 할 수 있게 보호자들이 아이들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는 아파트도 요즘은 많습니다.
아이를 마중 나온 작가는 오래 전부터 동네에서 알던 소년과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봐왔던 작가의 이웃사촌입니다. 흰띠를 매고 놀이터를 뛰어다니던 꼬마가 어느덧 훌쩍 자라 열한 살이 되었습니다. 소년은 태권도장에 등원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또래 아이들은 초록띠 노랑띠 등 다양한 띠를 매고 있는데 소년은 바짓단이 잘록한 도복 차림에 벌써 품띠를 매고 있었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에 그저 멀뚱히 서 있는 것도 어색해서 작가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너 벌써 품띠야?”
“2품이에요.”
도장에서 배운 품새를 복습하면서 놀이터가 떠나가라 우렁차게 기합을 지르던 꼬맹이는 어느덧 간 데 없고 무뚝뚝한 남자아이로 자란 녀석과 어떻게 대화를 끌어가야 할 지 몰라 작가는 자신이 아는 태권도와 관련된 정보를 끌어 모아 대화 소재를 떠올렸습니다.
“품띠부터는 국기원에서 심사본다며? 무지 어렵다던데 넌 어때?”
“국기원부터가 진짜죠. 이제 3품 따려고 연습 중이에요. 저는요, 태권도에 소질이 없거든요? 그래도 자신은 있어요.”
“아, 그래? 너 정말 대단하다.”
“전 진짜 열심히 하거든요.”
그러면서 태권소년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어떻게 팔고사는지 아세요? 우리 사범님이 해 준 얘긴데요, 히말라야 사람들은 양의 가격을 매길 때 산 중턱에 양을 풀어두고 지켜본대요. 풀을 뜯으러 양이 산비탈로 올라가면 작은 양이라도 값을 비싸게 매기고 산 아래로 내려가면 아무리 큰 양이라도 가격을 내린대요.”
양의 가치를 매길 때 현재 양의 크기가 아니라 양의 의지를 본다는 것이지요. 비탈을 오르는 양은 지금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신선하고 좋은 풀을 먹으면서 튼튼해집니다. 하지만 산 아래로 내려간 양들은 당장은 풀을 먹지만 곧 먹을 풀이 없어져 서로 경쟁하다가 굶어 죽거나 못 먹어 허약해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산비탈을 올라가는 양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니까요. 소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제가요, 4년쯤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소질은 없어도 진짜로 열심히 하잖아요? 그러면 실력이 쌓여요.”
그러면서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품띠를 가리키며 태권소년은 ‘이게 무슨 뜻인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중요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백절불굴. 백 번 꺾여도 백 번 다시 하기. 이게 바로 태권도 정신이에요.”
작가는 알았답니다. 이 아이는 지금 산비탈을 오르는 중이라는 걸. 그리고 소년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너 진짜 멋지다.”
“저도 알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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