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딸 앞으로 온 택배 박스를 뜯었다가 아내한테 혼이 난 적 있습니다. 박스를 개봉하면서 딸이 품었을 기대감, 설렘, 즐거움을 빼앗은 무심한 아빠라는 게 이유입니다. 그 후로는 내가 주문한 물건이 아니면 박스를 절대 허락 없이 뜯지 않습니다.
‘언박싱(unboxing)’은 이제 단순히 박스를 열고 제품을 꺼내는 일상적 표현이 아니라 ‘구매의 기쁨과 즐거움을 타인과 공유하는 문화적 행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구글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언박싱은 2006년 말부터 검색량이 급격히 늘어나 지금은 현대 소비문화에서 강력한 심리적 유희이자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심리적으로는 ‘기대감’이 ‘소유’로 전환되는 결정적 순간이 보상을 얻기 직전에 인간이 느끼는 쾌감을 자극함으로써 도파민을 분출시킨다는 겁니다. 또 박스를 뜯고 비닐 벗기는 소리 같은 ASMR 요소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광고비 한푼 들이지 않고 브랜드를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품의 성능만 좋으면 되는 걸 넘어 패키징 디자인과 개봉 경험도 브랜드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이지요. 손으로 느끼는 질감과 감촉, 공기의 압력, 또 뚜껑을 여는 순간 특유의 향기가 퍼지도록 설계된 박스까지 모두 제품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결국 정성스러운 포장과 구성품 배치 같은 것들도 기업이 고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며 스토리텔링이라는 마케팅 요소로 작용합니다.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언박싱은 보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인플루언서들이 언박싱하는 영상을 보면서 취향, 경제력,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회적 의미까지 부여합니다.
결국 온라인 구매는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최종 과정, 즉 배달된 박스를 손으로 뜯고 상품을 만지는 경험은 아날로그적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내가 주문했지만 멋진 선물을 받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존중받고 특별한 사치를 누리는 순간이어야 합니다. 이 짧은 시간의 경험은 고객이 상품이나 브랜드와 어떻게 소통하고 연결되는가에 대한 물리적, 감각적 절차입니다. 퀵배송, 새벽배송과는 차원이 다른 매우 강력하고 혁명적인 마케팅 수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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