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유병철 기자] 성공적인 복귀 그 이상이다.
배우 이나영이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이하 아너)를 통해 의미 있는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10일 종영된 ‘아너’는 거대한 스캔들이 되어 돌아온 과거에 정면 돌파로 맞서는 세 여성 변호사 윤라영(이나영 분), 강신재(정은채 분), 황현진(이청아 분)의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방영 전부터 이나영의 3년 만 드라마 복귀작이자, 여성이 이끄는 법정물이란 소식에 관심이 쏟아졌다.
“작품에 출연할 타이밍이 맞았어요. 오래전부터 여성 서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예전에는 단면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았지만, 지금은 결이 다양해지지 않았나. 배우로서 도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할 때 만난 작품이에요.”
‘아너’는 원작 스웨덴 드라마처럼 현재의 거대한 한 사건과 주인공의 과거 사건이 맞물려 하나의 진상을 겨냥하는 구조로 몰입을 높였다. 극 중 대규모 범죄 카르텔인 비밀 성매매 어플 ‘커넥트인’ 피해 사례와 주인공 삼인방이 20년 전 겪었던 일이 교차하며 매회 반전이 돋보였다.
“주제가 무거운 심리 스릴러인데다 여성 세 명이 이끌어 나가는 작품이지 않나. 과연 시청자가 공감하며 잘 따라와 주실까 우려가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작품이 잘 만들어졌고, 이입해줘서 다행이에요. 현장에서 좋았던 분위기와 작품을 향한 저희들의 진심이 잘 전달되지 않았나 싶어요.”
과거와 현재의 중심축이 바로 이나영이 연기한 윤라영이다. 극 중 여성 범죄 피해 전문 로펌 L&J에서 언론과 대중을 전담하는 셀럽 변호사지만, ‘커넥트인’의 뒷배면서 20년 전 그에게 데이트 폭력 트라우마를 안겨준 전 연인이자 가해자 박제열(서현우 분)이 등장하면서 흔들리는 인물이다.
“유난히 슬펐던 드라마에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만 해도 대사만 잘 외우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감정 신이 전반에 포진해 있어서 준비를 많이 해야 했어요. 촬영 끝난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때가 생생해요. 마지막 회를 보면서도 당시 감정이 차올라서 힘들었어요. 현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함께 교감도 쌓고 신나게 지내다가도 문득, 슬픈 감정이 툭 하고 올라왔어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게 마음에 들어와서 그런가 싶어요.”
이나영은 윤라영의 상처 입어 연약해진 모습부터 이를 딛고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는 변호사로서의 강단 있는 모습까지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진가는 감정 신에서 드러났다. 자신의 범죄 피해를 생방송에서 고백하거나, ‘커넥트인’의 피해자 한민서(전소영 분)가 친딸로 드러났을 때 이나영은 긴 호흡의 응시로 인상을 남겼다.
“감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어요.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장난을 치다가도 갑자기 슬퍼지는 특이한 경험을 했어요. 촬영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게다가 라영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지 않나. 확 내지르지 못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이나영은 작품의 메시지까지 빛냈다는 평가다. 윤라영의 행보가 그랬듯 그간 쌓아온 커리어적 명예를 잃을 수 있는 선택이라도, 무력한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존엄을 지켜내는 삶의 방식이 진정한 승리임을 보여줬다.
“라영은 정의로움, 상처, 죄책감을 지닌 복합적인 인물이죠. 엄마라면 딸의 허물을 어떻게든 감춰주려고 하겠지만, 라영이 꼭 변호사라서 죗값을 치르라고 설득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민서도 삶을 살아가야 하니 당연한 행동 같아요. 민서가 더 이상 면회 오지 말라고 했을 때도 ‘못되게 굴어도 돼. 다음 주에도 여기 와 있을게’라며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도 비슷해요. 피해자들이 상처를 받았더라도 용기 있게 살아가길 옆에서 기다려 주는 태도죠. 이 작품의 미덕도 비슷해요. 상처를 덮어두려고도 하거나, 일어나라고 강요하지 않고 용기 내서 살아가길 옆에서 그저 지켜주는 마음이요.”
‘아너’는 이나영, 이청아, 정은채 여성 3인방의 케미가 돋보이는 드라마다. 20년 지기 사이인 윤라영, 강신재, 황현진은 우정을 연료로 나아가는 여성 연대를 펼쳤다.
“그동안 작품에서도 사석에서도 여성 배우들을 만날 일이 많지 않았어요. 나와 이청아, 정은채 모두 낯가림이 있어요. 리딩 할 때부터 어색해했어요. 저는 평소 장난을 잘 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자칫 타인에게는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항상 조심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았어요. 감독님이 잘 이끌어 줬어요. 세 명 배우 중 튀는 사람 하나 없고 성격이 다 비슷비슷했어요.”
남편이자 배우 원빈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원빈은 영화 ‘아저씨’ 이후 16년째 공백기를 갖고 있다. 이나영이 인터뷰에 나설 때마다 원빈 복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저희 부부는 서로 놀리는 대화를 많이 해요. 원빈 씨가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면서 ‘뭐지 뭐지?’라며 계속 떠봤어요. 저는 끝까지 안 넘어갔어요. 원빈 씨도 연기 욕심이 많아요.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나영도 작품의 공백이 긴 편이다. 2010년 KBS 드라마 ‘도망자 Plan.B’에 출연한 이후 9년 만에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으로 안방에 컴백 했고, 이후 4년이 지난 2023년 웨이브 오리널 ‘박하경 여행기’로 다시 얼굴을 내비쳤다. ‘아너’ 또한 3년 만의 복귀작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 본능에 맡겨요. 다음엔 어떤 작품을 해야겠다며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아요. 다만 시나리오가 중요해요. 예전에는 못했을 이야기지만 지금은 할 때가 됐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 것 같아요.”
영화 활동을 봐도 그의 소신은 뚜렷하다. 2012년 ‘하울링’ 이후 6년 만에 ‘뷰티풀 데이즈’로 스크린에 컴백했다. 공백 기간 동안에는 비교적 대중적인 관심이 떨어지는 단편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최근 ‘신원미상’ 출연 소식도 전했다.
“단순해요. 시나리오가 좋으면 단편이든 장편이든 상관없어요. 영화 보는 것이 인생의 낙이에요. 작품을 보면서 위안을 삼고 희열을 느끼죠. 좋은 영화를 볼 때면 그 안에 들어가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고 생각해요. 거대한 꿈을 갖기보다 그렇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이나영은 ‘아너’를 통해 성공적인 안방극장 복귀를 할 수 있었고,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뷔 28년 차인 그에게 연기는 여전히 숙제다.
“내년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올해만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려고 해요. 진심이 통하도록 하는 게 배우로서 해야 할 일 같아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면서 다양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작품은 생소하고 어려웠던 것도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어요. 또 다른 가지를 뻗은 것 같아요.”
[사진 제공 = 이든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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