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송인호 기자] 반도체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전략산업이다. 막대한 투자와 일자리, 기술 경쟁력을 창출하는 산업의 성장을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산업의 성과는 한 지역에 집중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농업·안전 부담은 인접 지역에 남는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김보라 안성시장이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의 방류수와 발전소·송전선로 문제를 다시 논의하자고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시장의 제안은 기존 협약을 당장 파기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협약 체결 뒤 달라진 사업 여건을 반영하고 주민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다시 꾸려 방류 방식과 피해 예방·보상 대책을 구체화하자는 것이다. 직방류를 전제로 협상하지 않겠다는 발언도 협상 자체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피해가 우려되는 주민과 지방자치단체가 방류 방식부터 테이블에 올려놓고 논의하자는 요구다.
상생협약 현황과 진행상황 /안성시
◇바뀐 여건, 다시 논의하자는 것은 당연하다
안성시와 용인시, 평택시, SK하이닉스 등이 참여한 상생협의체는 2021년 15개 협약을 체결했다. 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이 가운데 2개는 이행을 마쳤고 7개는 추진 중이며, 6개는 세부 내용을 논의하고 있다. 협약은 상생의 출발점이지만 한번의 서명으로 미래의 모든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협약 체결 이후 산업단지와 전력시설 계획은 구체화됐다. 시가 제시한 자료에는 하루 방류량이 약 33만6000톤에서 48만6000톤으로 늘어나는 계획이 담겼다. 1.05기가와트 규모 LNG 열병합발전소와 3기가와트 규모 LNG 복합화력발전소, 전력 공급을 위한 송전선로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당초 협약 당시와 달라진 조건이 있다면 그에 맞춰 영향과 대책을 다시 따지는 것은 협약을 뒤집는 일이 아니라 약속을 현실에 맞게 책임지는 일이다.
시가 우려하는 고삼저수지는 총저수량 1610만톤 규모다. 수혜 농경지는 2970ha에 이르고, 4579명의 농업인이 이용한다. 친환경 농가 142곳도 저수지 물을 농업에 사용한다. 방류수가 수질과 농업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예방·복구·보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의 요구는 지역 이기주의로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생활과 생업을 지키려는 주민의 정당한 질문이다.
안성시의 피해유발 요인. /안성시
◇‘상생’은 협약서가 아니라 이행으로 증명된다
상생협약의 의미는 약속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얼마나 책임 있게 보완하는 지에 달려 있다. 특히 환경과 농업에 관한 협약은 “관리하겠다”는 선언보다 측정 항목과 주기, 기준, 공개 방식, 피해 발생 시 책임 주체가 분명해야 한다.
시는 특정수질유해물질 32종과 일반 항목 17종 등 49개 항목의 검사, 수질·대기 측정, 수생태계 건강성 평가, 농업환경·토양 조사 등을 제안하고 있다. 방류 전 조사와 방류 후 모니터링을 이어가고 주민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피해가 확인됐을 때 농산물 보상과 농지 복구를 어떤 절차로 진행할지까지 미리 합의해야 한다. 기준과 절차가 구체적일수록 갈등은 줄고 협약에 대한 신뢰는 높아진다.
반도체 공정에서 우려되는 물질을 농업용수 검사 항목에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는 시의 문제 제기도 주목할 만하다. 개별 사업자와 지방자치단체의 협의만으로 전국 산업단지에 적용할 기준을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다. 중앙정부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국가 기준을 마련하고 측정과 공개, 사고 대응, 피해 구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방류수에 대한 불신을 지역 간 힘겨루기로 남겨두지 말고 제도와 데이터로 풀어야 한다.
상생협의체 운영 방안. /안성시
◇주민 없는 협의는 상생의 이름을 얻기 어렵다
새 협의체에 중앙정부와 경기도, 안성시, 관계 공공기관, SK하이닉스와 발전사뿐 아니라 주민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는 시의 구상은 그래서 중요하다. 고삼저수지를 이용하는 농민과 방류수·발전소·송전선로 영향권 주민이 의사결정 과정에 들어와야 한다. 설명회 한 차례로 주민 참여를 대신하거나, 이미 정해진 계획을 전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주민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먼저 듣고 그 우려를 어떤 조사와 기준으로 확인할지 합의해야 한다. 수질·대기, 농업, LNG 발전소와 송전선로를 분야별로 나눠 실무 논의를 하더라도 최종 판단은 지역 전체의 안전과 생업을 함께 살피는 방식이어야 한다. 주민의 질문에 자료로 답하고, 조사 결과에 따라 계획을 조정할 수 있어야 참여가 실질적인 권한이 된다.
송전선로의 주거 밀집 구간 지중화, 발전소 입지 조정, 천연가스관 경로 변경과 같은 요구도 같은 원칙으로 살펴야 한다. 모든 요구가 그대로 수용될 수 있는지는 각각의 기술·비용·안전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검토 과정과 판단 근거를 공개하고 대안을 함께 찾는 일은 사업 주체가 져야 할 책임이다.
방유수 관련 안성시의 요구사항. / 안성시
◇산업의 속도만큼 책임의 속도도 빨라야 한다
정부와 경기도는 조정자 역할을 미뤄서는 안 된다. 여러 지자체와 기업, 주민의 이해가 얽힌 사안을 당사자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두면 협의는 길어지고 불신은 깊어진다. 중앙정부는 국가 기준과 제도 개선을 맡고 경기도는 광역 차원의 조정과 중재를 책임져야 한다. 시는 주민 의견을 토대로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고 사업자는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투명하게 제공해야 한다.
무엇보다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기업은 법적 기준을 충족하는 데서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사업으로 영향을 받는 이웃의 걱정을 듣고 과학적 검증을 함께하며 피해를 줄일 대안을 먼저 제시하는 태도가 산업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만든다. 방류 방식을 포함해 가능한 대안을 열어놓고 주민이 납득할 수 있는 안전장치와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기업의 장기적 이익에도 부합한다.
반도체 산업의 성장과 지역 주민의 삶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환경과 안전에 대한 기준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 일자리와 세수의 기대만큼 오염·재해·농업 피해 가능성도 정직하게 따져야 한다. 그것이 국가 전략산업에 걸맞은 책임이다.
김보라 안성시장. /안성시
◇결자해지, 약속을 만든 주체가 해법도 내놓아야‘
결자해지(結者解之)’는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과 방류·전력시설 계획을 추진해 온 정부와 경기도, 지방자치단체와 사업자가 이제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안성시의 문제 제기를 산업을 가로막는 목소리로 몰아가거나 기존 협약을 내세워 재논의를 막는다면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김보라 시장의 항변에는 안성의 물과 농지, 주민의 삶을 지키려는 요구가 담겨 있다. 기존 협약을 당장 파기하지 않되 달라진 여건을 반영하고 협약보다 후퇴하지 않는 대책을 마련하자는 제안은 협상의 문을 다시 열자는 것이다. 정부와 경기도는 협의체를 뒷받침하고 기업은 책임 있는 자료와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주민은 논의의 당사자로 참여해야 한다.
상생은 한쪽의 양보를 다른 쪽의 성과로 포장할 때 이뤄지지 않는다. 피해 가능성을 먼저 인정하고 측정 가능한 기준과 책임 있는 보상으로 답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반도체 산업의 성과가 지역의 불안과 맞바뀌지 않도록 협약을 맺은 주체들이 이제 결자해지해야 한다. 안성시의 이유 있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 용인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여는 첫걸음될 것이 분면하다.
※ 통찰추호(洞察秋毫)는 가을철 새의 가는 털까지 꿰뚫어 본다는 뜻으로 작은 변화 속에서도 본질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