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김민혁 기자] 한지 위에 번진 먹빛이 벽을 타고 올라간다. 삼청동 한복판, 고요한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한벽원미술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전시실은 바람 한 점 없이 정적이다. 그러나 캔버스는 말이 많다. 이은호 작가의 초대전 ‘생명의 순환성’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마주한 건 흰 여백에 둥그런 형상이 떠오른 그림이다. 물고기, 식물, 선, 동그라미. 가까이 다가가자, 글씨가 보인다. 먹으로 쓴 시구절이다. “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작가는 그림을 시작하기 전, 먼저 시를 쓴다. 그 위에 이미지를 덧그린다. 우연히 번진 먹의 흔적 위에 질서 있게 안료가 얹힌다. 인생이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우연 속에 나만의 선택을 덧붙이는 것.
전시를 따라 걷는다. ‘물과 불’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 멈춘다. 왼편에는 물고기 무리가 뒤엉켜 거대한 형상이 되었고, 오른편에는 불꽃을 닮은 선들이 흩어진다. 서로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순환이 있다. 물과 불, 탄생과 소멸, 상반된 것이 돌고 돌아 하나로 이어진다.
사진: 이은호 작가 작품. 순환-어둠
‘겨울’은 다른 작품보다 한결 잿빛이다. 눈물 같은 얼룩이 중앙에 있다. 작가의 부모가 떠난 계절, 그가 스스로와 슬픔을 설득하듯 그린 그림이다. 차분하지만 지독히 개인적인 감정이 화면을 적신다.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던 관람객 한 명이 눈을 떼지 못한다. 조용한 전시장, 그림이 말을 건다.
‘행복한 꿈’은 전시의 결을 바꾼다. 용, 돼지, 하늘을 나는 괴물들. 장난기 섞인 그림 같지만, 현실을 견디기 위한 꿈의 상징이다. 작가는 말한다. “살기 위해선 가끔은 환상이 필요하다.” 결국 그 역시 순환의 일부다. 현실과 환상이, 희망과 무력감이,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원.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전시 제목이 다시 보인다. ‘순환’. 삶의 리듬을 기억하게 하는 단어다. 그림들은 시가 되고, 상징이 되고, 다시 침묵이 된다. 삼청동의 봄바람이 미술관 바깥에서 흔들리지만, 이 안의 시간은 고요하다.
이은호 작가의 이번 전시는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드는 전시다.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고 싶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