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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범의 千글자]...디지털 경험

| 입력 : 2025-05-27 08:15

[신형범의 千글자]...디지털 경험
요즘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웃을 수도 있지만 승용차에 두꺼운 지도책을 한 권씩 싣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나 잘 모르는 장소에 가려면 먼저 지도책을 펼쳐 목적지까지 가는 대략적인 큰 길을 숙지합니다. 그리고 근처에 도착해선 작은 길이나 골목을 찾아 목적지가 확대된 세부지도를 다시 펼쳐보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귀찮고 번거롭지만 그렇게 해서 쌓인 경험은 곧 나의 길이 됐습니다.

그러다 내비게이션의 등장으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주소를 찍고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만 가면 틀림없습니다. 막히는 길도 피해 가고 예상 도착시간도 알려줍니다. 지성과 감각을 내비게이션에 맡긴 후부터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생각하지 않게 됐습니다. 결국 ‘내비’가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는 인간이 돼버렸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줄어들거나 사라진 중요한 경험이 또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식당에 가도 종업원의 안내를 받기 힘들어졌습니다. 키오스크로 주문부터 계산까지 끝냅니다. 음식 서빙도 로봇이 하는 경우엔 식당에 들어가 진짜 말 한마디 안 하고 밥만 먹고 나올 때도 있습니다. 이런 디지털 형태로 전해지는 경험은 기억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의 많은 기억들이 소프트웨어를 통해 여과되고 모니터링되고 지배를 받습니다.
편의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적 접촉의 기회와 경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 톨게이트나 유료주차장에서 맞이하는 징수원의 미소, 은행 창구에서 따뜻하게 주고받는 직원과의 가벼운 인사도 이젠 과거의 추억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서로 표정을 봅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표정은 많은 것을 말해주는 비언어적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입술의 경련이나 수상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숨겨진 진실을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한 신뢰와 호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면 이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디지털 신호는 거짓일 경우 성공할 확률도 더 높습니다.

이렇듯 몸으로 느끼는 경험이 사라진 풍경은 좀 삭막합니다. 가령, 여행은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한 컨텐츠 생산의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다림의 여백과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채우면서 자신과 내면의 대화나 주변을 관찰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경험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스스로의 육체를 통해 직접 느끼는 것입니다. 전화나 자동차가 물리적 거리를 줄였다면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은 아예 공간과 시간의 감각을 없애버렸습니다. 많은 경험은 지루함을 동반하는데 그 지루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오히려 인간적 감각을 회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

sglee640@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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