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황상욱 기자]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에요. 우리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죠." 세종대학교 세종뮤지엄갤러리 2관에서 열린 《집, 그 너머의 풍경》 전시장에서 만난 한경원 작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자신의 철학을 꺼내놓았다. 그의 작품 속 '집'은 단지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을 품은 풍경이었고, 감정을 전하는 언어였다.
이번 전시는 2월 26일부터 3월 9일까지 진행되었으며, 40여점의 회화 작품을 통해 '집'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시간, 기억, 자연, 정서로 확장한 예술적 여정을 보여주었다.
그리는 동시에 짓는 집
한경원 작가의 작업은 전통 한지를 찢고 겹치며 집의 구조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화면 위에 칸을 세우고, 창을 만들고, 지붕을 얹으며 하나의 집이 탄생한다. 마치 회화이자 건축이며 동시에 감정의 조형이다. 작가는 이를 "그리는 동시에 짓는 집"이라 표현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형상을 넘어, 한국인의 공동체적 정서와 자연과의 조화를 담고 있다. 그의 집들은 절대 혼자 있지 않다. 어깨를 맞댄 이웃들과 함께, 하나의 마을을 이룬다. 그 사이에는 늘 꽃과 나무, 바람과 햇살이 흐른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어요. 집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았죠. 저도 그런 한국적인 감각을 지금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기억의 방에서 만난 감정
전시는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기억의 방'은 시간과 가족의 흔적을, '문 밖의 세계'는 자연과 집의 연결을, 그리고 '추상적 풍경'은 형태 없는 감정과 상징의 흐름을 담아낸다. 특히 마지막 공간에서는 집의 형체는 사라지고, 색과 질감만이 남아 기억이 감정으로만 남게 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한경원 작가는 "나이가 들수록 집의 정확한 모습은 흐릿해지지만,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은 오히려 선명해진다"며, 기억과 감정의 본질에 대한 예술적 탐구를 전했다.
그것의 일환으로 그녀의 ‘집’은 이제 전시장 너머의 공간에서도 사람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오는 4월 15일, 한경원 작가의 작품 세 점이 서울 은평성모병원 12층 호스피스 병동에 설치될 예정이다. 입구 복도에 한 점,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병실 두 곳에 각각 한 점씩 조용히 놓인다. 병동을 찾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에게 그녀의 그림은 심미적 기능을 넘어 기억을 환기시키고 감정을 어루만지는 창이 되어줄 것이다.
작가는 말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작은 풍경, 그것이 바로 ‘집’이 아닐까 합니다.”
그녀의 ‘집’은 이제, 삶의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감정의 배경이자, 누군가의 마지막 기억 속에 따뜻하게 자리 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햇살가득한집./한경원
프랑스 유학생이 말한 '나의 집'
이번 전시가 특히 인상 깊었던 순간은, 바로 우연히 전시장에 발걸음을 들인 두 프랑스 유학생과의 만남이었다. 이들은 새 학기를 시작하기 위해 한국에 막 도착한 학생들로, 기숙사에서 산책을 하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전시 안내를 보고 들어왔다고 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온 그들의 표정에는 잔잔한 감정이 엷게 남아 있었다. 파리 출신의 유학생 클로에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색감이 예뻐서 그냥 들어와봤어요.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이상하게 어릴적 자란 집 생각이 났어요. 한국의 집들인데… 너무 낯익은 감정이 느껴지는 거예요.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그리운…
함께 있던 마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작가의 그림 속 집들이 건축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품고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저도 정확히 뭘 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또 저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어요. 그리고 한국이 처음인데, 부모님이 계시는 따뜻한 집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이 짧은 대화 속에는 한경원 작가의 예술이 지닌 보편성과 깊이, 그리고 '집'이라는 주제가 사람에게 얼마나 본질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담겨 있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이야말로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외교의 언어"임을 보여주었다. 한국인의 집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감정의 보금자리이며, 한경원의 작품은 그 이야기를 언어 없이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냈다.
세종뮤지엄갤러리에서의 전시는 끝났지만, 그가 지은 '마음의 집'은 관람객 하나하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모두, 누군가의 그림 속 집을 통해 자신만의 고향을 다시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