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통령 선거가 꼭 일주일 지났습니다. 어렸을 때 배운 대로 선거의 기본원칙은 보통, 평등, 직접, 비밀 네 가지입니다. 그 중 비밀선거는 투표 전이나 공표가 금지된 투표기간에 투표 내용을 공개하면 여론과 선거운동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알려선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선거도 끝났고 ‘비밀’을 밝혀도 전혀 영향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5번 후보에게 투표했습니다. 최종 득표율 0.98%, TV토론회에 초청된 후보 4명 중 꼴찌를 한 후보입니다. 애초 목표했던 3%는 넘지 못했지만 왜 진보정치가 필요한가를 증명한 숫자라고 (내 마음 대로)생각합니다.
비방과 혐오만 넘쳐나는 토론회에서 그나마 진보 의제를 선명하게 제시하면서 토론다운 토론을 한 유일한 후보입니다. 진짜 의미는 토론에서 언급하지 못한 그의 공약을 통해 드러납니다. 다른 후보들도 저출생, 보육, 돌봄, 노인, 장애인 등에 대해선 ‘구색 갖추기’처럼 공약사항에 다 끼워 넣었습니다.
하지만 권영국의 입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단어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철거민, 쪽방주민, 노점상, 노숙인, ‘폭염이나 혹한이 기승을 부려야만 주목받는 가장 소외된 약자 중의 약자’ 같은 말입니다. 강제퇴거 및 철거 금지, 쪽방촌 공공주택지구 지정, 노점상 생계보호 특별법, 홈리스 형벌화조치 중단 같은 말은 그냥 공약이 아니라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외치는 구조신호입니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에 이어 관심의 변방으로 밀려난 빈민까지 권영국이 말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로 남을 뻔했습니다.
유세 마지막날 그는 서울 혜화역에서 이동권 투쟁하는 장애인을 만났고 구의역을 찾아 9년 전 사망한 청년노동자를 추모했으며 강남역에선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밤에는 또 다시 노동자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로 달려갔습니다. 선거운동 마지막까지 사회의 그늘지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진보정당 후보들은 선거 때마다 ‘사표론’에 시달립니다. 사표(死票)는 낙선한 후보에게 하는 투표로 주권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는 ‘죽은 표’라는 의미입니다. 사표론은 거대 정당의 인질이라 불릴 정도로 양당제의 폐해를 상징하는 한국정치의 특징적인 현상입니다. 거기다가 다당제를 가로막고 진보층의 주권행사를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반면 결선투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처럼 사표를 제도적으로 막는 정치개혁은 더디기만 합니다. 압도적인 ‘정권교체론’에 밀려 1%도 못되는 초라한 득표지만 우리 사회에도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건강한 진짜 진보들이 다양하게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삶에서 밀려나고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살자는 공동체들이 여럿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이번에 투표한 의미입니다. 지지율 1%대 후보가 아니면 쉽게 손 내밀고 기대기 힘든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들도 동시대를 함께 사는 이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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