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첫 번째 읽은 소설이 김진명의 《직지; 아모르 마네트》입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을 모티프로 조선의 금속활자 기술자가 독일의 구텐베르크에게 기술을 전수해 줘 〈42행성경〉을 인쇄하게 됐다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버무린 픽션입니다.
소설에서 당시 조선의 양반들과 중세 유럽의 교황청을 비롯한 기득권층이 금속활자의 보급을 막은 이유가 ‘지식=권력’이라는 등식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지식의 생산과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했는데 금속활자는 이 희소가치를 지닌 ‘독점성’을 파괴하고 대중에게 전파하는 ‘위험한 도구’로 인식한 것이지요.
실제로 세종이 재위한 31년 7개월 동안 국정을 기록한 〈신역 세종실록37〉 1444년 1월 19일치에는 “주상이 언문 28자를 친히 만들었다. 초성 중성 종성으로 돼 있는데 이를 합쳐야 글자가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쓸 수 있다. 글자는 간단한데 무궁하게 응용할 수 있으며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반면 당시 최고 지식인 그룹인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이 퍼지는 걸 반대했습니다. 1444년 3월 9일 상소에서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티베트 같은 곳만 자기 글자를 갖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오랑캐들의 말이므로 말할 것이 못 된다… 따로 언문을 제작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귀중한 약재를 버리고 말똥구리의 똥의 취하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했습니다.
2022년, 뉴질랜드 의회는 새 법안 하나를 통과시켰습니다. 법안의 이름은 ‘쉬운 말 법(Plain Language Act.)’. 말 그대로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모든 문서는 쉽고 명확하게 쓰는 걸 법으로 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민의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게 근거입니다. 국민이 글을 읽고 원하는 정보를 찾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용자 중심의 언어관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취 상태로 거주지로 이송됐다’는 ‘술에 취해 집으로 실려갔다’로, ‘금전적 이득’은 ‘돈’, ‘종결하다’ 대신 ‘끝내다’로 표현하는 겁니다.
성과는 예상보다 컸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민원 전화가 사라져 행정비용이 줄었고 정부를 향한 시민들의 신뢰는 두터워졌습니다. 어려운 말로 권위를 세우던 공무원들이 쉬운 말로 시민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헌법부터 시작해 법조문만 봐도 기가 막힙니다. 심지어 국어기본법은 ‘국민의 창조적 사고력의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겁니다. 벌써 머리가 아픕니다. 쉬운 언어는 단지 말을 쉽게 쓰자는 캠페인이 아닙니다. 쉬운 정보를 제공받을 시민적 권리를 확인하고 지키는 일입니다. 언어가 일종의 권력이라면 쉬운 언어는 그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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