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고졸 고시생 송우석은 너무 힘들어서 고시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공부하던 책을 다 팔아치운 다음 국밥집을 찾았습니다. 책 판 돈으로 그동안 밀린 외상값을 갚으려고 돈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국밥집을 나오고 맙니다. 그 길로 중고책방으로 가 팔았던 책을 되찾고 결국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국밥집을 찾았습니다.
“아지매, 지 기억 안 납니까?”
“… 내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해 가…”
“여서 밥 묵고 도망간 놈입니다. 한 7년 전에…”
“아, 그 고시 공부하던… 니 참말로 그 문디가? 시험 붙었나?”
“예, 인자 변호사됐씸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진작에 찾아 왔어야 됐는데…인자서 밥값 내러 왔씸니다.”
“치아라, 내 그거는 진작에 까묵고 없다. 니 잘돼 갖고 이래 찾아와 준 걸로 됐다 마.”
“그래도 이라믄 안되지요.”
“자고로 묵은 빚은 돈 말고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라. 그라이 자주 오라꼬, 알겠나?”
2013년 개봉한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송우석(송강호)이 부산에서 고시 준비할 때 자주 가던 국밥집 아지매(김영애)를 7년 만에 다시 찾은 일화로 내가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베트남 초대 주석 호찌민은 전쟁 중에 5천 명의 인재를 유학 보내면서 말합니다. “나라가 어려워 너희들에게 연필 한 자루 못 쥐여 보낸다. 하지만 너희는 국민에게 큰 빚을 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 돌아와선 안 된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고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빚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국밥값도 국비 장학생도, 금융빚은 말할 것도 없고 말빚 마음빚도 있습니다. 그 중에 묵은빚은 말그대로 오랫동안 갚지 못하고 있는 빚인데 좋지 못한 감정이나 원한 따위가 쌓인 것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도 이 말을 씁니다.
빚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우면 옛날 어른들은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마라’ ‘천천히 망하려면 밭농사를 짓고 빨리 망하려면 빚보증 서라’고 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게 운명입니다. 살면서 누구나 운명 같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송우석 변호사가 국밥집 아줌마의 아들 변호를 맡지 않았다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국밥 한 그릇은 얼마나 할까요, 그건 돈 얼마가 아니라 국밥에 담긴 마음의 가치일 것입니다. 산해진미로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고도 조금의 빚진 마음 없이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국밥 한 그릇의 신세도 잊지 않는 마음과 그걸 그저 돈이 아닌 마음으로 정산해버리는 마음이 부쩍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해 넘기기 전에 갚아야 할 묵은빚이 없는지 따져봐야겠습니다. 얼굴이든 발품이든 마음이든 갚아야지요, 어떤 형태로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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