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작고한 한국 굴지의 재벌기업 총수는 생전에 개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개 키우는 일에 돈과 정성을 쏟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도견을 분양하는 데에도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그 회장님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가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 있습니다. 사람은 움직일 수 있고 관계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 기대에 정확히 부응하지 않지만 개는 자신이 기대한 대로 정확하게 반응하고 그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다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반려동물로 가장 많이 키우는 동물은 개입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들고 조금만 삐끗하면 깨지기 쉬운 관계에 지친 현대인들이 맹목적인 신뢰를 갖고 절대 배신하지 않을 생명체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위안과 평정심을 얻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살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나 친척, 연인 또는 믿고 같이 일하던 동료로부터 배신당한 경험 있으세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 한두 번쯤 배신당한 사람은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배신을 당해 본 적 없는 사람을 찾는 게 오히려 어렵습니다. 결론은 배신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뜻입니다. 배신당한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그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러면 그 만한 숫자의 배신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를 배신한 적 있냐?’고 물어보면 그런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자신이 누군가를 배신했거나 뒤통수를 쳤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세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배신은 능동태는 없고 수동태만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거울 보고 쳐도 셈이 안 맞는다는 고스톱처럼 배신당한 사람은 있는데 배신한 사람은 없습니다. 배신한 사람은 없고 당했다는 사람만 있는 이유를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내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는데 상대방의 행동은 현상이나 결과부터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살다 보면 실제로 자신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상황이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한 중년 남자는 자신이 정말 자상한 아빠이고 딸과의 관계도 친구처럼 지낸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3짜리 딸의 빈 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딸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일기장에는 아빠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가득했던 겁니다. 배신감이 말도 못했습니다.
이 아빠는 ‘배신당했다’고 인식하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처럼 현실에선 배신당한 경험이 많지만 어떤 면에선 ‘배신’이라는 말은 남용되는 경향이 있고 진짜 배신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배신감은 자신의 욕망이나 기대를 상대에게 투사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인 경우도 많습니다. 결론은 ‘배신’을 말하기 전에 내 행동은 현상부터 보고 상대의 행동은 동기부터 파악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가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억울해 하는 걸 보고 생각한 내용입니다. 친구야, 그거 배신 아닌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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