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네 편을 10년에 걸쳐 번역을 마친 김정아 박사 얘기(8/5일자 참조)를 [아침일기]에 소개한 적 있습니다. 탐나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구입을 망설이는 중이라고 썼었는데 마침 그걸 읽은 친구가 책을 사서 보내왔습니다. 내 생애 손에 꼽을 정도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선물입니다. 선물 같은 거 받아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무덤덤한 성격인데 이번만큼은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귀하게 느껴져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책은 나무에서 섬유질을 분리한 펄프를 가공해 만든 종이에 활자를 인쇄한 발명품입니다. 결과적으로 책장 한장한장은 나무에서 온 것이어서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으면 큰 나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오디오북도 있고 전자책으로 읽는 사람도 많아져 독서환경이 달라지긴 했습니다만.
오랫동안 책은 눈으로 조용히 읽는 매체로 알고 있지만 인류는 상당 기간 귀로 들었던 게 먼저입니다. 인간은 글을 배우기 전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어머니의 자장가, 예전부터 내려오는 신화 역시 구전으로 이어져왔습니다. 어쩌면 시각보다 청각이 더 읽기의 본능적인 감각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디오북은 눈으로 읽을 때보다 더 깊은 층위로 정보가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또 전자책은 무겁고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작은 기계 하나로 다양하고 놀라운 기능을 갖춰 독서의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해줍니다. 하지만 오디오북이나 전자책은 결정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일단 해당 기기(디바이스)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작동시킬 에너지원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몇백 년 후까지 살아남을 매체는 오디오북,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여전히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리, 냄새, 부피감 같은 책의 물성을 말하는데 그것 말고도 종이책이 갖고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일단 오디오북이나 전자책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수용자의 입장이라면 종이책은 내가 주도적으로 읽어간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나만의 속도로 한줄한줄 읽어가기 때문에 텍스트의 난이도에 따라 빨리 또는 천천히 읽거나 속도를 조절해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여백을 이용해 메모를 하고 줄을 긋거나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적어가면서 읽는 내내 저자와 대담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이든 저자가 전달하는 지식보다는 그걸 통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종이책은 앞선 전자기기들에 비해 훨씬 자기주도적으로 읽는 느낌이 강한 매체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인류가 만든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정보기록 장치인 종이책은 몇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전해졌고 아득히 먼 미래에도 정보의 손실 없이 존재할 기록장치는 종이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과 나의 뇌를 연결시켜 줄 것입니다. 내 생애 가장 두꺼운 종이책을 선물 받고 감격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습니다. 고맙다 친구야! ^^*
[비욘드포스트 이순곤 기자] sglee640@beyond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