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일에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일을 즐겼고 매사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퇴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힘든 일을 피하게 되고 하더라도 설렁설렁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나한테 남은 날을 세어보기 시작한 것이. 내 의지 대로 먹고 주변의 도움 없이 걸으며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얼마 전 영화배우 신영균씨의 백순 잔치에 많은 영화인과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모였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신영균씨는 “내가 벌써 백살이라니, 말이 되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뉴스는 전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궤적을 잠시 부러워하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도 지금보다 더 좋아지고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의 나보다 내년의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더 좋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하는 속도는 느려지고 성과는 줄어든다 해도 성실하게 일하는 선배,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도록 관심을 가져 주는 선배, 내가 젊은 시절에 감사했던 선배들처럼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노년과 죽음을 준비하는 건 현명한 일이지만 남은 날을 세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성장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즐기고,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기뻐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어느 시점까지는 노력하지 않아도 성장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밥만 먹어도 자라고 잠만 자도 쑥쑥 커집니다. 넘어져도 성장하고 가만히 있어도 익어갑니다. 자연현상 같은 겁니다. 반면 어른은 노력하지 않으면 성장이 때맞춰 이뤄지지 않습니다. 일상은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고 자원은 늘 부족합니다. 그런 가운데 나뿐 아니라 자녀, 후배, 팀원 등 주변의 성장을 돌봐야 하는 어른에게 성장이란 경험이 아닌 전략적으로 해내야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다행인 것은 어른도 가끔은 저절로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울면서 배우고 넘어지며 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른은 애쓰지 않으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언제부턴가 성장을 성취 혹은 성공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해본 일과 알고 있는 것이 늘어나며 새로운 성취가 줄고 올라가는 삶의 어려움만큼 쌓이는 성공의 크기가 줄어들며 경험을 통해 배우는 성장의 기쁨을 종종 잊습니다.
아이는 새로 경험하는 바깥세상을 발견하며 자란다면 어른은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며 성장합니다. 앎에 대한 탐구가 어린 가슴을 키운다면 모름에 대한 수용은 어른의 마음을 자라게 합니다. 내가 다 안다는 생각만큼 지루하고 무기력한 건 없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전부 알 수 없는 타인의 사정이, 저마다 자신의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른을 자라게 합니다. 106세 철학자 김형석 박사는 에세이집 《백년을 살아보니》에서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얼마나 느끼고 감동하며 살았는지가 인생의 부를 결정한다”고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