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럴 때 있지 않나요?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읽어내지 못해 당혹스러울 때. 잘 두지는 못 해도 바둑에 관심이 많은 나는 구글이 만든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붙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세돌이 알파고에 1대 4로 지면서 패배감과 무력감은 물론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같은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대국을 기점으로 바둑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일 큰 변화는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예전엔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승패를 떠나 명승부를 연출한, 예술의 경지에 오른 대국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파고 이후 바둑은 오로지 이기는 확률과 계산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둑을 공부하는 방법, 바둑을 관전하는 문화도 달라졌습니다. 어렵게 구한 명장들의 기보를 해석하고 연구하던 프로기사들이 이젠 없습니다. 실시간으로 승률을 계산해내는 AI가 추천하는 수와 형세판단 데이터를 공부합니다. 바둑 프로그램이 보급되면서 고수들 간의 공동연구는 사라지고 명인이나 스승에게 배우기보다 AI를 교과서 삼아 실력을 쌓습니다.
이제 바둑은 예술이 아니라 스포츠가 되기로 입장을 정했습니다. 프로기사들도 예전엔 정답이라는 진리를 찾아 탐구하는 자세였는데 이제는 AI에 의해 만들어진 모범답안을 누가 더 잘 찾아내는가로 바뀌었습니다. 기사들의 목표도 달라졌습니다. 중국의 천재 기사 커제 9단은 여전히 세계 탑클라스이지만 최근에는 소셜미디어의 수백 만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로 활약이 더 두드러집니다. AI와 승부를 포기한 인간은 스토리를 만들고 스타가 되는 데 더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바둑에서처럼 인간이 지켜온 가치들을 언제든지 AI가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AI로 인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위기감입니다. 바둑에서 일어난 변화가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근거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에서도 AI가 쓴 소설이 인간보다 탁월하고 대중의 선택을 더 많이 받을 때 작가들은 어떻게 될까요. AI가 만든 작품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면 문학은 더 이상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문화예술에서 그토록 추앙받던 창의성이라는 가치도 퇴색될 수 있습니다. AI의 등장으로 ‘훌륭한 예술’의 의미를 지금과는 다르게 정의해버리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동안 알던 개념을 AI가 새로운 관점으로 보고 인간은 그것을 다시 배우도록 강요당하며 AI가 만드는 새로운 질서를 그저 따라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가치가 기술을 이끌지 못하고 기술이 가치를 훼손하는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규정하고 기술을 둘러싼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기술과 관련된 가치기준을 세우고 이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가치에 기반한 미래를 상상하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미래를 바꾸는 것, 그것이 현재 시점에서 AI가 아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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