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이성구 전문위원] 이란 전쟁의 여파로 세계 천연가스 공급망이 '날벼락'을 맞으면서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들이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란전쟁으로 천연가스 공급이 차질을 빚어 인도 파키스탄뿐 아니라 한국도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사진=UAE 석유생산시설, AP, 연합뉴스
특히 천연가스는 원유와 달리 수급 유연성이 낮아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들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된다.
블룸버그 통신은 19일(현지시간) 신흥국들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다시 닥친 가스 위기로 타격을 받고 있으며 산업 수요가 회복 불가능할 수도 있는 수준으로 위축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2위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인 카타르는 최근 이란의 공격으로 주요 LNG 시설이 큰 피해를 봤다.
카타르의 LNG 생산시설. 사진=AFP, 연합뉴스
카타르 국경 에너지 기업인 카타르에너지의 사드 알카비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이번 피격으로 회사의 LNG 수출 용량의 17%가 손상됐으며 이를 복구하려면 3∼5년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에너지 동맥'으로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도 중동산 LNG 공급에 차질을 불러왔다.
LNG는 수급 유연성이 낮은 것이 큰 약점이다. LNG는 원유와 달리 국가별 전략 비축 제도가 없다.
극저온 액화 가스의 보존 비용이 많이 드는 탓에 많은 국가에서 수시로 수입해 바로 소비하는 구조가 굳어져 있어 물동량 감소가 치명타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은 가스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지만, 배기가스 감축을 위해 석탄 대신 천연가스로 대거 에너지 비중을 높인 신흥국들에는 이는 쉽지 않은 선택지다.
블룸버그는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 등 아시아 지역의 신흥국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짚었다. 아시아는 카타르산 LNG 5분의 4를 구매하는 최대 고객이며, 파키스탄의 경우 카타르산 가스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99%에 달한다.
파키스탄 당국은 이미 다음 달 중순이면 가스 부족으로 전력 수요량을 맞추기 어려울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최대 수출 산업인 섬유업은 이중 타격에 직면해있다. 공장 내 전력 생산은 물론 섬유 처리 공정에도 가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취사용 가스 부족으로 거리에서 주먹다짐까지 벌어지고 식당과 호텔들이 임시 휴업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도 거리에서 유통되는 취사용 가스. 사진=AP, 연합뉴스
필리핀과 베트남은 LNG 선박 운송료가 이란 전쟁 발발 뒤 2배 이상 뛰자 가격이 진정될 때까지 사실상 가스 구매를 중단키로 했다.
호주 리서치 업체인 MST마키의 사울 카보닉 에너지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가스 위기와 관련해 종말론적 시나리오로 치닫고 있다"며 "전쟁이 설령 끝나도 시설 파손 정도에 따라 LNG 공급 차질이 수개월에서 수년간 지속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미국의 에너지 유통 업체인 데븐포트 에너지의 토비 콥슨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이번 사태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것"이라며 "공급난이 수개월 지속되면 가스 가격 지표가 포물선을 그리며 폭등할 공산이 크다"고 분석했다.
◇ '가스대란 트라우마' EU도 비상…물량 확보전
유럽연합(EU)에도 가스 대란은 우려되는 상황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가스값이 폭등해 공장 폐업이 잇따르는 등 실물 경제가 위축되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도 가스 대란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사진=유럽 가스보관선, AP, 연합뉴스
전쟁 전 EU가 전체 가스 수요에서 러시아에 의존하던 비중은 40%에 달했다.
EU는 이후 가스 수입국을 다변화하고 LNG 수입 터미널을 확충하며 가스 보존 목표량을 설정했으나, 이번 가스 공급난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프란치스코 블랑치 글로벌 원자재 리서치 총괄은 "유럽은 이번 혹한기를 거치며 가스 재고가 매우 낮은 상태로 향후 2∼3개월 내 비축분을 다시 채워야 한다"며 "가스 절대량이 부족한 만큼 '수요 배분'과 같은 강제적 조치가 불가피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대만과 한국도 카타르산 LNG의 손실분을 메우고자 가스 물량 확보에 나섰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한국은 가스 부족에 대비해 별도로 석탄 발전의 운영 한도도 올렸다.
유럽과 아시아 간 가스 확보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아직 운송지가 확정되지 않은 LNG 선적 물량을 두고 서로 더 비싼 가격을 불러 배의 행선지를 바꾸는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제가스연맹(IGU)의 메넬라오스 이드레오스 사무총장은 "가격 폭등이 본격화하면 자금력이 풍부한 선진국이 입찰 경쟁을 계속하고 저소득 국가는 시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된다"며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유통되는 물량의 공백은 그 어떤 수단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세계 1위의 LNG 수출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산 LNG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번 가스 위기가 미국의 LNG 산업 성장과 관련 일자리 확대 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 제재로 유럽 LNG 시장을 잃자 중국으로 판매 활로를 열었는데 이번 사태로 대중 수출을 더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달 초 중국은 신규 5개년 계획으로 러시아의 숙원이던 '중-러 중앙 노선 천연가스관' 건설의 가속화를 발표했다. 중국은 애초 공급선 다변화를 위해 해당 가스관 계획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동발 에너지 공급난에 입장을 바꾼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