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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범의 千글자]...루틴

입력 : 2026-03-24 08:24

[신형범의 千글자]...루틴
그 수가 적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딸도 그 중 하나인데 전공인 미술사를 재미있어 하고 또 공부하는 것도 당연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 석사 논문을 쓰고 있는 딸을 보면 그게 또 반드시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는데 이 아이가 진짜로 공부를 좋아하는 게 맞나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딸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일단 주변 청소부터 합니다. 그런 다음 책상을 정리하고 차를 끓여 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그래도 집중이 안 되면 갑자기 친구에게 줄 선물을 찾아내 포장을 하고 그게 끝나면 뭐 또 할 일이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다 마땅한 게 없으면 ‘배가 고프다’ ‘비가 오니까’ ‘꼭 봐야 할 책이 있어서’라며 또 미적거립니다. 그렇게 공부는 또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하다하다 정말 할 게 없으면 그제서야 공부를 시작하는데 이 모든 과정은 딸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 루틴입니다.(딸, 미안… ㅠㅠ)
‘루틴’, 하면 운동선수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구에서 타석에 들어서면 발로 타석을 고르고 방망이를 반드시 두 번 빙빙 돌리는 타자가 있습니다. 자유투를 던지기 전 바닥에 농구공을 꼭 다섯 번을 튀겨야 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경기장에 들어갈 땐 반드시 왼발부터 딛는 선수도 있습니다.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처럼 서브를 넣기 전에 엉덩이에 낀 바지를 빼는 독특한 루틴을 가진 선수도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에게 루틴은 대부분 사소하고 단순하지만 자기 컨디션을 확인하는 기회이자 최상의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의식 같은 것입니다. 루틴이란 원래 일상, 혹은 틀에 박힌 일을 뜻합니다. 보통 회사원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지하철 타고 출근해서 어제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밥 먹고 TV 보다 잠드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루틴에 관해서라면 2016년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패터슨의 직업은 버스기사입니다. 매일 같은 노선을 반복해 운행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 로라가 묻습니다. “오늘 어땠어?” 패터슨의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똑같았어.” 저녁이면 반려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바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는 것도 매일 똑같습니다. 매일매일이 ‘Ctl+C, Ctl+V(복사해서 붙인 것)’ 같지만 다른 게 딱 하나 있습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시를 씁니다.
영화니까 매일 똑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줄 순 없습니다. 루틴으로 가득한 월요일부터 시작된 영화는 토요일 밤에 절정을 맞습니다. 패터슨 부부가 영화를 보러 간 사이에 마빈이 패터슨의 노트를 갈기갈기 물어뜯은 겁니다. 패터슨이 그동안 쓴 시가 적혀 있는 노트입니다. 패터슨은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기억이 가뭇하지만 어쨌든 루틴에 관한 한 내가 본 최고의 영화입니다.

다시 딸 얘기로 돌아와서, 딸이 공부하기 전 루틴은 가만히 보면 운동선수나 패터슨의 루틴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냥 공부가 하기 싫은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막상 또 공부를 시작하면 재미있어 합니다.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시작이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루틴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루틴이 있으면 하기 싫은 마음과 잡념을 줄이고 자연스럽게 공부에 몰입하는 단계로 진입할 수 있으니까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샤워할 때, 밥 먹을 때, 운동할 때. 일할 때도 자신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루틴이 있습니다. 루틴을 만드는 것은 자기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 해내기 위한 마음의 준비운동 같은 것 아닐까요. ^^*

sglee640@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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